열악한 장애인 노동현실, 장애인 노동권 3대 요구안 제시
‘착취당할 자격’조차 없어 버려진 장애인들
노동 개념에 균열내는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제도화 요구
5월치고는 쌀쌀한 날씨에 비까지 온 131주년 세계노동절의 날인 5월 1일, 중증장애인들이 여의도 국회 앞 이룸센터에서 장애인 노동권 3대 요구안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각종 문화공연을 선보이며 “이것도 노동이다”라고 외쳤다.
그들의 주장은 사실이다. 2020년부터 서울시가 시범사업으로 도입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아래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이러한 활동을 ‘노동’으로 인정하고 있다. 예술이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한 전문가만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오늘날, 기존 시각에서 보자면 중증장애인들의 몸짓과 노래 실력은 보잘것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애초에 전문가성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문화예술활동을 통해 장애인이 여기 존재함을 드러내고, 장애인의 일상을 풍부하게 만드는 데에 오히려 해방감을 느끼는 듯했다. 이들의 몸짓은 자연스럽게 비장애인 중심의 세계를 드러냄과 동시에 장애인이 차별받는 세상 속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는 데에까지 닿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왜 노동이 될 수 없는가? 장애인을 차별해선 안 된다는 지극한 명제를,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이들이 대신하고 있는데?
- 열악한 장애인 노동현실, 장애인 노동권 3대 요구안 제시
“이것도 노동이다.” 장애인들이 이러한 구호를 외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장애인의 노동 현실은 매우 열악하다. 2020년 기준, 15세 이상 장애인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37%로 전체인구의 경제활동참가율 63%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으며, 장애인 고용률 역시 34.9%로 전체인구 60.2%보다 턱없이 낮다. 장애인 임금근로자 월평균 임금은 192만 2000원으로 전체인구 268만 1000원보다 매우 낮다. 중증장애인의 노동 사정은 경증장애인보다 더 열악할 수밖에 없다. 최저임금 적용 제외 조항, 중증장애인에 적합한 일자리 부재 등은 중증장애인의 열악한 노동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날 결의대회를 개최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는 △중증장애인 최저임금 적용 제외 조항 폐지(최저임금법 개정)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전국 제도화(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개정) △중증장애인 동료지원사업 전면 개편을 정부에 촉구했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란 경제 활동의 기회가 거의 없었던 최중증장애인을 대상으로 △장애인권익옹호활동 △장애인문화예술활동 △장애인인식개선활동 등의 직무를 통해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일자리이다. 이들은 한국정부가 비준한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의 사회적 홍보와 실질화를 위해 해당 직무를 수행한다.
- “자본이 만든 생산성의 기준을 바꿔나가자”
정창조 전장연 노동권위원회 간사는 자본의 기준으로 정해진 생산성으로 인해 장애인들이 노동에서 배제되었다고 설명했다. 정 간사는 “자본은 자신들이 착취하기 좋은 몸은 가져다 쓰고, 착취당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은 사회 바깥으로 내몰고 시설에 가두었다”면서 “131년 동안 노동해방 세상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투쟁해왔으나, 아직 노동해방 세상은 찾아오지 않았다”고 통탄했다.
정 간사는 “정부는 장애인에게 최저임금을 주지 않기 위해 작업능력평가라는 걸 한다. 그런데 이러한 평균적 생산성에 대한 기준은 누가 정했나? 바로 자본이 이윤 창출을 하기 위해 만든 것 아닌가. 오직 자본의 기준일 뿐이다”라고 분노했다.
최저임금법 제7조는 ‘정신장애나 신체장애로 근로능력이 현저히 낮은 사람’에겐 최저임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때 최저임금 적용 제외 여부는 ‘작업능력평가’로 결정된다.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는 이를 폐지하고 최저임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권고한 바 있으며, 민주노총 또한 이러한 내용을 담은 ‘최저임금법 개정안’ 발의를 준비 중이다.
정 간사는 “더이상 장애인이 생산성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소위 자본이 말하는 ‘정상인’의 기준에 들고 싶지도 않다”면서 “기존의 생산성 기준에 장애인을 끼워 맞추는 것만으로는 장애해방, 노동해방을 이뤄낼 수 없다. 우리가 하는 ‘권리중심 공공일자리’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을 깨뜨리는 새로운 실험이 되고 있다. 장애인이 앞장서 투쟁해서 생산성의 기준을 바꿔나가자”고 외쳤다.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 또한 “이윤과 생산성을 중심에 두는 기업의 논리로 인해 노동에 대한 평가가 왜곡됐다. 우리는 새로운 노동의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이윤을 남기지 않고, 함께 관계를 만들어 나가면서 서로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삶도 노동이 될 수 있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비장애인의 편협한 인식의 틀을 깨주는 장애인들의 노동이다”라고 말했다.
- 설요한 죽음으로 몰아세운 동료지원사업, 전면 개편 요구
전장연은 고 설요한 씨를 죽음으로 몰아세웠던 ‘중증장애인 동료지원사업’에 대한 전면 개편도 요구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문제점이 지적된 후에 월급제 도입 등 일부 문제가 해결되긴 했으나, 여전히 슈퍼바이저·사업운영비·참여자·취업연계수당 등의 예산은 책정되지 않고 있다.
현재 피플퍼스트센터에서 동료지원가 일자리에 참여하고 있는 김동호 활동가는 “돈을 너무 조금 준다. 내 월급보다 쥐꼬리가 더 길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20명을 5번씩 만나야 한다. 총 1년에 100번 만나야 하는데, 작년에는 실적 못 채우면 월급을 회수해간다고 해서 압박감이 심했다”면서 “게다가 서류작성까지 해야 한다. 밤늦게까지 서류 작성하다가 택시 타고 집에 간 적도 있다”고 말했다. 업무는 과도한데 일자리는 1년짜리 계약직이다.
김 활동가는 코로나로 인한 어려움도 토로했다. 그는 “(장애인고용공단은) 온라인 비대면으로 사람을 만나라고 하는데 발달장애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방안”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이 일자리가 중증장애인의 취업 연계를 목적으로 하면서도 공단이 중증장애를 이유로 장애인의 취업을 거부했다고 질타했다. 그는 “이럴 거면 왜 사람들에게 취직해서 열심히 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올해 실적제가 아닌 월급제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실적 채우지 못해 낮은 평가를 받으면 안 되기 때문에 결국 달라진 건 없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들은 △동료지원가 1명당 참여자 4명 지원으로 수정 △동료지원상담 참여자의 지속 참여 보장(취업에 참여할 때까지 인정) △동료지원가의 참여자 일자리 지원에 권리중심형 공공일자리와의 연계 포함 등으로 사업 내용을 근본적으로 개편할 것을 고용노동부에 요구했다.
- 민주노총 “장애인도 함께 일하는 평등한 일터 위해 노조 필요”
이날 결의대회에는 고 김재순 노동자의 아버지 김선양 씨도 참가했다. 고 김재순 씨는 지난해 5월, 광주 조선우드 공장에서 홀로 합성수지 파쇄기에 올라가 폐기물을 제거하던 중 미끄러져 빨려 들어가 ‘다발성 분쇄손상’으로 사망했다. ‘2인 1조’ 작업이 지켜지지 않은 노동환경에서 일어난 전형적인 산재였다. 고인은 25살의 중증 지적장애인이었다.
김선양 씨는 “재순이가 처참하게 세상을 떠난 지 346일째다. 마음은 아직 재순이를 떠나보내지 못했다”라면서 “조선우드 박선규 사장은 아직까지 사죄 한마디 하지 않고 변명을 일삼으며 재판을 연기하고 있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이게 국민을 위한 나라이고 장애인복지에 최선을 다한다는 문재인 정권의 모습이란 말인가”라면서 “장애인 노동자가 노동의 권리를 보장받을 그 날까지 오뚝이처럼 지치지 말고 함께 투쟁해나가자”고 외쳤다.
장애인 노동권 쟁취를 위해 민주노총도 연대를 약속했다. 곽이경 민주노총 미조직전략조직국장은 “일터에 장애인이 채용되면 비장애인의 노동강도가 높아진다는 불만이 있다. 그러나 장애인에게 필요한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특권이 아니며 비장애인의 희생도 아니다. 당연히 회사에 요구해서 함께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그래서 노조가 더더욱 필요하다. 그게 평등을 지향하는 노조가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민주노총 또한 올해 내에 장애인 의무고용률 달성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이들은 노동권 3대 요구안 쟁취 결의대회에 앞서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 해단식을 진행했다. 해단식에서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420공투단 해단식이지만 올해 투쟁을 결의하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비장애인 중심사회를 장애인이 먼저 투쟁해서 장애인도 함께 사는 세상으로 만들자. 우리의 투쟁에 타협은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