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조회 수 19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고병권의 묵묵]삶이 가장 축소된 순간, 혼자여선 안돼

 

등록:2020.04.26

 

 

l_2020042701003105000251011.jpg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며칠 전 미국의 한 연구자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코로나 시대 시민들의 상호부조와 연대에 대한 책을 함께 쓰고 싶다고 했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도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돕고 있는지,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에도 불구하고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를 모두에게 알리자는 것이다. 위험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생명을 살리기 위해 헌신하는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발코니에 나와 노래하고 연주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는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한 많은 이야기를,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가 사회심리학적 백신 개발의 시급성에 대해 말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다른 존재에 대해 형성하는 어떤 표상들은 코로나19 이상으로 전파력도 크고 치명적이다. 인간은 공포를 느낄 때 심리적 면역력이 크게 떨어진다. 이런 때 사람들은 평소라면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말들을 쏟아내고 터무니없는 폭력을 공공연히 자행한다. 지금이 바로 그렇다. 세계 곳곳에서 외국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나타나고 주류 미디어에서조차 이를 조장하는 말들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온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는 죽음의 수용소란 우리 영혼의 밑바닥에 전염병처럼 잠복해 있던 타인에 대한 표상이 떠오른 결과라고 했다. ‘이방인은 모두 적이라는 표상이 그것이다. 평소에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자신이 감염된지도 모를 수 있다. 그러다가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순간, 이를테면 공포를 느끼는 순간에 이 표상은 사람들의 머릿속을 뒤덮는다. 그러면 이방인이 적으로 보이는 환각 작용이 일어난다.

이런 일들은 대개 사회가 비상사태에 처할 때 나타나지만, 비상은 정상으로부터의 일탈이 아니라 정상에 대한 폭로일 때가 많다. 실제로 방역 모델은 근대적 주권 모델과 무척 닮았다. 두 모델에 전제된 타인에 대한 표상이 특히 그렇다. 안전을 위해 타인을 무증상 감염자로 간주하라는 방역 지침과 타인을 본성상 늑대로 간주하고 안전책을 도모하는 사회계약론은 멀리 있지 않다. 타인에 대한 이런 표상은 사람들을 혼자 떨어져 무력하게 만든다. 서로를 불신하기에 사람들은 국가를 믿는다. 근대 사회계약론은 이런 식으로 국가 출현을 정당화했다. 원자화된 인간이 절대주의 국가의 토대가 되어준 것이다.

 

 

공동 격리를 택한 활동가들과 방호복을 입고 중증장애인 옆에 나란히 선 활동가들의 모습은 함께 존재란 걸 일깨워준다

세상에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인간은 인간에게 신이다라는 말도 있다. 둘 중 어떤 표상이 더 현실에 부합하는지를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가진 표상에 따라 저마다의 현실을 갖게 된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외국인이 적군처럼 보이는 사람은 실제로 외국인에게 적군처럼 행동하고, 타인을 바이러스덩어리로 보는 사람은 그 자신이 타인에게 그렇게 다가가며, 마스크를 집어든 타인을 약탈자로 보는 사람은 그 자신이 약탈자처럼 마스크를 집어들 것이다. 불행히도 세계 곳곳에서 우리는 이런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나라는 나라에 갇혔고, 도시는 도시에 갇혔으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집에 갇혀 있다. 최고의 방역을 위해서라면 아예 모두를 11실에 가두어야만 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내게 메일을 보낸 연구자가 말하듯 우리에게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의 메일을 받고 떠오른 것은 중증장애인들과의 공동 격리를 자원한 장애인 활동가들의 이야기였다. 방역당국은 코로나19에 감염됐거나 감염이 의심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가격리를 명령했지만 중증장애인들은 자가격리된 채로는 살 수 없다. 정부가 아무 해결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을 때, 대구와 서울의 장애인 활동가들이 감염자들과 공동 격리를 자원했다.

 

이들은 요즘 흔히 하는 말로는 영웅들이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영웅담은 아니다. 나는 이들이 지켜낸 타인에 대한 표상과 우리 삶의 안전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싶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가장 먼저 희생당한 사람들은 시설에 수용된 중증장애인들이었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는 시설 수용을 중증장애인들의 안전을 위한 최고의 선택지처럼 말해왔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이것이 최악의 선택지였음을 보여주었다. 공동 격리를 택한 활동가들, 방호복을 입고 중증장애인 옆에 나란히 선 활동가들의 모습은 우리가 함께 사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삶이 가장 축소된 순간에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혼자여서는 안 된다는 것 말이다. 혼자는 삶의 단위가 아니다. 삶의 최소 단위는 함께이며, 작은 함께가 모여 큰 함께를 이루는 것이다. 나는 공동 격리를 자원한 장애인 활동가들한테서 그것을 보았다.

 

 

 

 

출처:

http://biz.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2004262052025&code=990100#csidx787b2450696e9599e03a7b395b38bcf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6 뉴스기사 독일의 사회보장(Soziale Sicherheit)의 역사 나라마다 어떤 사회보장 어떠한 견해로 이해하느냐란 문제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크게 근대이전, 근대, 현대로 나눌 수 있다. 많은 유럽 선진국가... 이음센터 2020.02.12 1237
75 뉴스기사 독일 정신지체 장애인들의 성인교육 역사 독일 정신지체 장애인들의 성인교육 역사 약 30년 전부터 시작된 독일의 정신지체 장애인을 위한 성인교육의 역사를 놓고 특수교육계 학자들은 뒤늦게 시작되었다... 이음센터 2020.03.13 421
74 뉴스기사 독일 장애인 공동체 베텔(Bethel) 독일 장애인 공동체 베텔(Bethel) 독일 베텔 독일 중부의 빌레펠트(Bielefeld) 시에 있는 베텔(Bethel) 공동체는 하나의 도시와 같은 곳이다. 이 공동체는 1867년... 이음센터 2020.03.13 744
73 뉴스기사 대구지역 장애인 탈시설 증언 구술기록집 발간 file 이음센터 2020.09.10 150
72 뉴스기사 뇌성마비 장애인 스포츠 뉴스 전하는 도맹그 file 이음센터 2020.08.18 126
71 뉴스기사 놀이는 누구의 것인가 file 이음센터 2020.12.02 208
70 뉴스기사 노동절, 장애인노조 깃발 휘날리며 “장애인도 노동자다” file 이음센터 2020.05.04 114
69 뉴스기사 내년도 활동지원 예산, 자연증가분에도 못 미쳐 내년도 활동지원 예산, 자연증가분에도 못 미쳐 2021년 활동지원 예산 14.8% 증액… 2017년 이후 가장 낮은 증가율 장혜영 의원 “활동지원 24시간, ... 이음센터 2020.09.07 130
68 뉴스기사 내 잘못도 아닌데… 활동지원 자부담 두 배 납부 내 잘못도 아닌데… 활동지원 자부담 두 배 납부 건강보험공단, 재산 신고 안 했다고 건강보험료 과다 책정 지자체-사회보장정보원-복지부 지침 없어, 환급... 이음센터 2020.08.18 139
67 뉴스기사 남아공 청각장애인 전문 댄서 벨름씨 눈길 file 이음센터 2020.06.25 199
66 뉴스기사 나의 멋진 엄마가 감옥에 갔다, ‘저항’이라고 했다 file 이음센터 2021.03.25 165
65 뉴스기사 김재순 장애인·청년·노동자의 죽음… 장애계 “사회적 타살” file 이음센터 2020.06.09 144
64 뉴스기사 김도현의 “장애학의 도전” file 이음센터 2020.02.17 287
63 뉴스기사 금천구청장 “루디아의집 3월 내로 시설폐쇄 예고 통보” 장애계와 약속 장애계, 금천구에 “소극적인 입장 버리고 적극적인 행정처분 나서라” 촉구 금천구청장 “루디아의집 3월 내로 시설폐쇄 예고 통보” 장애계와 약속 장애계, 금천구에 “소극적인 입장 버리고 적극적인 행정처분 나서라&rdq... 이음센터 2020.03.18 207
62 뉴스기사 그 매뉴얼은 죽음을 멈추지 못한다 file 이음센터 2020.06.29 161
61 뉴스기사 국제 장애단체 리더 3인 인터뷰…“정부, 장애인 복지에 돈 더 써야” 국제 장애단체 리더 3인 인터뷰…“정부, 장애인 복지에 돈 더 써야” (왼쪽부터)클라우츠 라흐비츠(II 대표), 아나 루시아 아렐라노(IDA 의장),... 이음센터 2020.02.12 182
60 뉴스기사 교육부의 ‘건강상태 자가진단’ 시스템, 시각장애학생 배제? file 이음센터 2020.10.27 278
59 뉴스기사 교육부, 올해 첫 장애인 고용부담금 내놓고 “반값 깎아 달라” 하민지기자 2021. 05. 28 15년간 한 번도 의무고용률 달성 못 한 교육부 이유는 “장애인 교원 찾기 어려워서” 하지만 교대 장애학생 모집비율, 의무... 이음센터 2021.06.01 327
58 뉴스기사 광역급행버스 ‘준공영제’ 시범사업에서도 장애인 이동권은 뒷전 file 이음센터 2020.09.10 150
57 뉴스기사 고 송국현씨 장례, 복지부 사과 때까지 무기한 연기 고 송국현씨 장례, 복지부 사과 때까지 무기한 연기 장례준비위원회, 복지부 공식 사과와 재발방지대책 촉구20일, 추모결의대회 후 복지부 장관 집까지 행진 등... 이음센터 2020.04.14 192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5 6 7 8 9 10 11 Next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