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계, ‘시설에서 죽어야 하는 사회’ 철폐하는 한 해 만들겠다
강혜민 기자
등록일: 2021년 1월 4일
긴급분산조치 촉구하는 농성장에서 신년 투쟁 선포식 열어
‘신아원 긴급분산조치 및 긴급탈시설 마련 권고’ 요청하며 유엔에 진정
광화문 해치마당에 펼쳐진 텐트에 “시설로 돌아갈 수 없다! 코호트 격리 당장 멈춰라!”라고 적힌 피켓이 붙어 있다. 그 뒤로 4일, 신년 투쟁 선포식을 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이 투쟁을 결의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 집단감염 신아원, 114명 중 55명 확진 판정… 긴급분산조치는 ‘아직’
감염병의 시대, 집단수용시설에 강제수용된 장애인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고 있다. 이에 대해 시설 밖 장애인들이 참혹한 현실을 국내외에 알리며 지역사회에서의 삶을 더욱 강하게 촉구하는 신년 투쟁 선포식을 열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광화문 해치마당에서 4일 오후 2시에 ‘2021년 투쟁선포 기자회견’을 열고, 집단감염이 발생한 신아원에 대한 긴급분산조치를 비롯한 ‘긴급 탈시설 정책’을 정부에 요구했다.
연말 끝자락인 2020년 12월 26일, 서울시 송파구에 있는 장애인거주시설 신아원에서 거주인 45명이 대규모 집단감염됐다. 이에 대해 장애계는 관리·감독의 책임이 있는 서울시에 즉각 코호트 격리 중단과 긴급탈시설을 요구하였다. 서울시는 장애계의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이행을 위해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아래 중대본)의 승인이 필요하다’며 중대본에 공을 넘겼다. 이에 장애계는 중대본에 재차 요구했지만 현재까지 중대본은 묵묵부답이다. 그동안 시설 내 감염은 점차 확산되어 4일 기준으로, 거주인 114명 중 55명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이 중 50명이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여전히 확진자 5명과 음성 판정받은 59명이 시설에 남아있다. 시설 내 거주인들은 코로나와 현 시설 상황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전달받지 못한 채 수용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광화문 해치마당에서 4일 오후 2시에 ‘2021년 투쟁선포 기자회견’을 열고, 집단감염이 발생한 신아원에 대한 긴급분산조치를 비롯한 ‘긴급 탈시설 정책’을 정부에 요구했다. 사진 강혜민
박경석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이사장은 “우리는 코호트 격리에 반대하며 확진자·비확진자 모두 긴급 분산하라고 중대본에 요구하며 지난해 31일부터 이곳에서 농성하고 있다”면서 “서울시는 중대본 허락 없이는 분산 조치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중대본은 복지부에 물어보라 하고, 복지부는 지자체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한다. 서로 핑퐁게임하듯 책임을 방기하며 매우 무책임한 방식으로 장애인의 생명을 가지고 놀고 있다”고 분노했다.
박 이사장은 “문재인 정부 임기가 500여 일 정도 남았는데 후보시설 문재인 대통령의 장애인 공약이 바로 ‘지역사회에서의 완전한 통합과 참여’였다.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겠구나, 희망했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라면서 “작년 내내 코로나 집단감염·사망으로 사람들이 죽었다. 사망자 중 장애인 비율이 가장 높다. 그래서 유엔에서도 긴급 탈시설을 이야기하지 않나. 유엔 말 잘 듣는 한국정부가 이런 말은 왜 안 듣나. 이게 문재인 정부의 민낯이다”라고 질타했다.
한국장애포럼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4일, 유엔 장애인권리특별보고관, 건강권특별보고관, 주거권특별보고관에 긴급분산조치와 긴급탈시설 방안 마련 권고를 요청하는 긴급 진정을 제기했다. 왼쪽은 진정서, 오른쪽은 발언하고 있는 류다솔 민변 변호사. 사진 강혜민
- 장애계, ‘신아원 긴급분산조치 및 긴급탈시설 마련 권고’ 요청하며 유엔에 진정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장애포럼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아래 민변)은 이날, 유엔 장애인권리특별보고관, 건강권특별보고관, 주거권특별보고관에 긴급분산조치와 긴급탈시설 방안 마련 권고를 요청하는 긴급 진정을 제기했다.
류다솔 민변 변호사는 “신아원을 포함해 장애인거주시설, 요양시설 등 모든 시설에 대한 무조건적인 코호트 격리조치는 우리나라가 가입한 유엔 사회권규약과 장애인권리협약 등 국제인권규범이 보장하는 장애인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한다”고 진정 이유를 전했다.
류 변호사는 “지금의 코호트 격리조치는 감염 여부에 불문하고 전체 시설을 폐쇄함으로써 장애인의 건강권을 침해하고, 장애인을 지역사회로부터 더욱 고립시키고 있다. 이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의 정신에 반한다”면서 “코호트 격리로 장애인은 정보접근권, 의료시설 등에 대한 접근권, 신체의 자유 및 안전,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 등도 침해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한별 한국장애포럼 간사는 “코호트는 의료적 방역지침이라기보다는 바이러스 배양에 가깝다. 이로 인해 폭증한 감염자는 방역당국의 부담으로 가중될 수밖에 없지 않나”라고 일침을 가하며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방역이 모두를 위한 방역이자,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사회가 모두를 위한 사회다”라고 강조했다.
최 간사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위원회 23차 회의에서 탈시설워킹그룹을 만들었는데, 앞으로 탈시설정책 수립에 관한 구체적 가이드라인을 만들 예정이다. 한국장애포럼 또한 장애인권에 기반한 탈시설 정책 의견을 제출하겠다”면서 “향후 한국정부가 이 가이드라인에 기초하여 탈시설지원법 등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인권규범에 부합하는 탈시설정책을 마련하도록 국내외의 투쟁을 이어나가겠다”고 밝혔다.
경찰은 ‘방역 지침 준수’를 이유로 아홉 명씩만 나갈 수 있다며, 해치마당에서 광화문광장으로 나가는 통로를 방패로 막아섰다. 사진 강혜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이 도로를 막아서며 집단 코호트 격리당한 장애인거주시설 현실을 알리고 있다. 사진 강혜민
- 가난하면 시설 들어가서 죽어야 하는 사회가 현재의 야만을 만들었다
정성철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는 가난하고 장애가 있으면 시설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시설사회를 철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 활동가는 “재난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가장 빠르고 날카롭게 안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면서 “정부는 기초생활수급비를 비롯한 60여 개의 복지선정기준이 되는 기준중위소득의 인상률을 코로나 경제위기를 이유로 대폭 삭감하고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공약도 결국 폐기했다”고 비판했다.
정 활동가는 “가난한 사람들은 수급받기 위해 (근로 무능력 나이로 판정되는) 65세만 바라보고 기다린다. 가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수급 신청하는 사람도 있다”면서 “근로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연락하지도 않는데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수급받을 수 없는 경우엔 요양병원과 같은 시설에 들어가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사회에서 분리해온 사회가 현재의 야만을 만들어냈다”고 분노했다.
이어 “가난하다는 이유로 감시하고 통제하는 ‘시설 사회’에서는 누구의 삶도 담보할 수 없다”면서 “장애인거주시설, 요양시설 등에서 확진자와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 지금의 위기상황에서 모든 시설을 폐쇄하고 근로능력과 부양의무 유무에 상관없이 지역사회에서의 삶을 보장하는 정책을 조속히 실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장애인 활동가의 휠체어가 경찰 방패에 의해 가로 막혔다. 사진 강혜민
- 자립생활 기반 닦았던 작년에 이어 올해 더 힘찬 투쟁 결의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지난 한 해의 성과를 기반으로 올해도 가열차게 투쟁하자고 결의했다. 최 회장은 “지난해 투쟁을 통해 복지부가 드디어 ‘활동지원 65세 연령 제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였고, 국회에선 탈시설지원법이 발의되었으며, 서울시가 전국최초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을 시작했다. 공공일자리 사업을 이제 올해 경기도에서도 시작한다. 우리의 투쟁을 통해 그동안 장애인 자립생활에 제약이 되었던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며 반가움을 전했다.
그러나 여전히 투쟁해야 할 수많은 과제들이 남았다. 최 회장은 “65세가 넘어서도 활동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나 그 부족분에 대한 지자체 추가 지원 이야기는 없다. 65세 이상에 대해서도 활동지원 시 추가 지원이 되도록 투쟁해야 한다”면서 “공공일자리도 고용노동부가 책임지고 전국 확산하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 올해 420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에 탈시설지원법이 제정됐으면 한다. 21년에도 가열차게 투쟁해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자회견을 마친 이들은 우동민열사 10주기 추모제에 참석하기 위해 구 국가인권위원회가 있었던 중구 금세기빌딩으로 이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해치마당에서 광화문광장으로 나가는 통로를 방패로 막아서며 ‘방역 지침 준수’를 이유로 아홉 명씩만 나가는 것을 허용해 기자회견 참가자들과 잠시 충돌이 일기도 했다. 또한, 활동가들이 광화문 해치마당에 긴급탈시설을 촉구하며 펼쳐놨던 1인용 텐트를 이고 가자, 경찰은 통행에 방해된다며 텐트를 빼앗으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이사장이 긴급 탈시설을 상징하는 1인용 텐트를 펼치고 이동하려고 하자 경찰에게 저지당했다. 경찰이 텐트를 빼앗으려고 하자 텐트를 붙잡으며 저항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출처 : 비마이너(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