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시설'은 이제 장애운동의 거대한 흐름이 되었다. 그와 함께 장애인이 지역사회 내에서 자립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도 강력히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다. 복지부는 '커뮤니티 케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러나 과연 탈시설이 '복지 체계 개편'으로 완료되는 과제인 것일까.
장애여성공감 부설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숨](아래 [숨] 센터)의 2018년 'IL(Independent Living)과 젠더 포럼'은 "교차성의 관점으로 시설화 비판하기, 탈시설 운동을 전망하기"를 주제로 선정했다. 24일 오후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진행된 이번 포럼에서는 시설의 범주, 탈시설 운동과 젠더를 연결한 고민, 그리고 탈시설 운동이 지향해야 할 지점 등 폭넓은 사유와 논의가 오갔다.
장애여성공감 부설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숨]은 24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교차성의 관점으로 시설화 비판하기, 탈시설 운동을 전망하기”를 주제로 한 'IL과 젠더 포럼'을 열었다.
우리가 '탈'해야 하는 '시설'은 "'비정상인' 수용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 권력"
[숨] 센터는 3년 전부터 '거주 시설 연계 자립 생활 지원사업'을 통해 장애인 거주 시설을 방문, 거주인들에게 탈시설 상담과 교육, 성과 재생산 권리에 대한 교육, 종사자 인권 교육 등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숨] 센터 활동가들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등록장애인 성별 비율은 남성이 58%, 여성이 42%인데, 시설 거주인 중 여성 장애인 비율은 통계에 비해 현저히 낮은 것이다.
활동가들은 다양한 가설을 모색했다. 장애여성은 경제활동을 하지 못해도 집안에서 돌봄 노동을 조금이라도 수행할 수 있다면 '집에 필요한 존재'가 되거나, 누군가의 사적인 '보호' 아래 가사노동·성노동·돌봄 노동을 무급으로 수행하기 때문에 시설로 유입되지 않는다는 가설, 누군가의 '보호'가 철회되었을 장애 여성, 특히 지적장애여성들이 성 판매로 유입되기 때문이라는 가설 등이 제기되었다.
나영정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는 "아직 '장애여성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이 질문은 탈시설에 대한 고민의 폭을 넓히고 방향을 여러 갈래로 만들었다"며 "우리는 '비정상인'들을 시설화하는 양상에 대해 함께 살피면서 장애여성을 찾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한국 사회에서 불온하고, 쓸모없고, 비정상이라는 이유로 시설에 수용되어 왔던 장애인과 불능화된 존재들의 역사를 계보화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나 활동가는 일제가 패전한 직후 일본 영토나 법을 침범한 조선인을 수용해 남한으로 강제송환했던 '오무라 수용소', 한센인을 격리한 소록도, 형제복지원 등을 예로 들며 이러한 시설들이 여전히 이주민, 정신장애인, HIV감염인, 노점상, 노숙인 등에 대한 국가 차원의 관리 시스템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나 활동가는 시설화의 역사와 젠더 문제를 연결하며 "이른바 요보호여성시설이라고 불리는 시설 수용의 역사는 전쟁미망인, 가출 여성, 윤락방지법상 규정된 여성, 미혼모 등 호주제도 아래에서 호주(주인)가 부재한 여성들을 지목했다"고 설명했다. 나 활동가는 "예를 들어 일정한 지역(집결지)을 떠나지 못하고, 소위 일반사회와 분리된 채 소모되는 삶을 살아야 했던 성 판매 여성의 삶을 시설화라는 메커니즘으로 이해해보는 것은 시설화에 대한 문제의식 확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진다"라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여성폭력 피해자(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피해 여성)를 위한 쉼터와 치료/자활 프로그램은 존재하지만, 장기적인 주거 지원, 소득지원 정책이 부재한 상황에서 이들이 경험하는 시설은 사회 복귀를 위한 준비일 뿐, 정책은 이 피해자들이 치료회복의 대상이라고 지목하나 시설에서 나온 이들이 복귀할 수 있는 사회 또한 제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나영정 활동가가 발제를 하고 있다.
나 활동가는 "이런 상황에서 탈시설 운동이 단지 시설이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의미할 때 여성과 소수자들이 '지역사회' 안에서 겪는 시설화 문제는 장애인 운동 안에서 의제화되지 못할 위험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나 활동가는 진정한 의미의 탈시설 운동은 시설화를 작동시키는 권력 관계를 해체하고, '의존'의 의미를 재정립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전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 살아가기 어렵다고 할 때, 그 사람이 무능력하기에 시설에 수용하면 된다고 상상하는 것, 그 안에 존재하는 권력 관계를 은폐하고 의존성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을 억압받아야 할 이유로 전치시키는 권력이 바로 시설화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나 활동가는 "시설화를 차별과 지배의 메커니즘이라고 파악할 때 차별과 낙인의 누적이 빈곤으로 이어지고, 삶의 장소에서 소외되고,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해치며, 지식과 기술을 익히는 교육에서 제외되고, 단지 소모되는 노동에 내몰린다는 도미노를 연상하게 된다"라며 "어떤 존재들이 장애화/무력화되는 관계를 해체하고 평등한 관계를 재구축하기 위한 운동은 장애인 운동으로 한정될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유토피아는 기다린다고 오지 않는다. 시설 폐쇄 후의 삶이 존엄할 수 있으려면 탈시설 운동으로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우리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를 만나서 함께 가야 할지 정확히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길 바란다"며 발제를 마무리했다.
지역사회에서는 갈 곳 없는 HIV감염인들, "요양병원=또 다른 시설"?
권미란 활동가가 발제하고 있는 모습.
권미란 에이즈환자건강권보장과 국립요양병원 마련을 위한 대책위원회 활동가는 HIV감염인들이 마주하는 '시설화' 문제를 공유했다.
권 활동가는 "항바이러스제 발달로 생존 감염인의 연령이 점점 올라가고 있고, 관계 단절과 1인 가구가 많은 특성도 있어 에이즈 환자의 장기요양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라며 "그러나 전국 1500개가 넘는 요양병원 중 에이즈 환자가 갈 곳은 없는 게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013년, 수동연세요양병원에서 30대 에이즈 환자가 입원 14일 만에 적절한 의료적 조치를 받지 못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HIV감염인에 대한 의료차별 문제가 대두되었고, 질병관리본부는 지난 11일 'HIV/AIDS 질병맞춤형요양(병원및돌봄)서비스 모델 개발' 사업을 입찰공고하기도 했다.
권 활동가는 "자못 안도와 기대감이 들면서도 걱정이 많이 된다"며 우려를 표했다. 권 활동가는 "얼마 전 에이즈 환자를 받아준다는 병원이 있어 가보았더니 50대 초반의 에이즈 환자가 누워 있었고, 병상에는 입원 날짜가 2005년이라고 적혀 있었다"라며 "돌아갈 집이 없다면, 지역사회와의 연계 혹은 자립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요양병원도 결국은 시설이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질병관리본부가 2013년 수동연세요양병원과의 위탁계약을 해지하자, 병원은 에이즈 환자들을 내보냈고, 갈 곳이 없었던 환자 중 일부는 음성 꽃동네로 간 사례가 있었다. 권 활동가는 "대책위 내에서도 '달리 갈 곳은 없고, 일상 지원은 필요하니 대안은 꽃동네'라는 말이 있었으나, 장애인단체에서 교황의 꽃동네 방문을 반대하는 것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라며 "오래전 꽃동네에 간 HIV감염인이 수십 리 길을 걸어 도망쳐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못 나오'는 상황에 처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고 당시 고민을 설명했다.
권 활동가는 "기존의 요양병원에서 배제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이즈 전담 요양병원에 대한 요구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인적, 물적 자원이 없는 상황에서 자칫 '에이즈 환자 수용소'가 되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있다"며 "요양병원에서 배제되지 않으면서 요양병원에 평생 고립되지도 않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할지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전했다.
IL 센터, '탈시설 운동'에서 다양한 정체성 모아내는 공간 되어야
조미경 소장은 IL 운동이 장애 이외에도 다양한 정체성과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미경 [숨] 센터 소장은 IL 센터가 정상성에 균열을 내는 탈시설 운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소장은 "우리 몸속 세포 사이사이에 스며들어있는 정상성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는 비정상이라 규정된 소수자들과의 연대, 교류를 통해 촉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라며 "IL 센터에서부터 일어난 균열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 소장은 "IL 운동이 간혹 잘못 해석되어 장애-비장애만을 비교하고 대치시켜 장애인이 경험하는 차별과 억압의 요인을 '비장애 중심'에서만 찾거나, '비장애인과 동등한 권리와 권력을 가지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경우가 있다"며 "그러나 이는 IL 운동의 의미를 매우 협소하게 해석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사람은 하나의 정체성만 갖고 사는 것이 아니기에, 가령 '장애 해방'이 된다고 하더라도 성별에 따른 억압이 있다면 '장애여성 해방'은 오지 않을 것"이라며 다양한 정체성이 교차하고 차별 역시 복합적으로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이에 조 소장은 IL 센터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 '시설화'와 연관된 문제를 분석하고, 탈시설을 위한 역할과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IL 센터에서 장애 이주민, 장애 성매매 종사자, 장애 노숙인, 장애 HIV/AIDS 감염인, 장애폭력피해자 등의 독립을 지원할 때 다양한 '시설화'의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하고, 이러한 연대의 장은 보다 다양한 장애인의 경험과 독립을 지지하는 토대가 된다"고 설명했다.
배복주 장애여성공감 대표는 "오늘 포럼은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많은 질문과 의제가 풍성하게 제시된 자리였다. 탈시설에 관한 의제는 앞으로도 계속 열어두고, 더욱 다양한 측면을 고민하여 '유토피아'를 준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포럼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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