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뉴스기사
2020.05.11 23:46

[고병권의 묵묵]약속

조회 수 19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고병권의 묵묵]약속

 

 

등록: 2017.08.27.

 

 

 

 

l_2020042701003105000251011.jpg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고려대 민연 연구교수

 

 

 

 

또 장애인 수용시설 이야기다. 지난 칼럼에 이어서 또 쓴다. 시설을 또 방문했기 때문이고 거기서 억울한 사람들을 또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얼마나 억울하냐면 그들 스스로 억울한 처지에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억울하다. 정서적 두려움 때문이든, 지적 역량 때문이든 자신의 처지를 따져볼 조건 자체를 상실한 사람들. 억울해서 울부짖을 수 있다면 그래도 덜 억울한 것이라는 걸 이번에 알게 되었다.

 

내가 만난 생활인들은 모두 1급장애인이었는데 대부분이 언어와 지체, 지능 등의 중복장애를 안고 있었다. 실태조사를 위해 조금이라도 대화가 가능한 소수의 사람들을 만났다. 대화라고는 했지만 힘겹게 낳은 단어들을 한 개씩 모으고, 손짓과 표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가능한 대화였다.

 

 

옆방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세상을 등진 것처럼 모로 누워 있었고, 한 젊은 남자는 전라의 몸으로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내 눈이 휘둥그레진 걸 본 생활교사는 쟤는 원래 저래요라고 했다. 그러고는 심상한 풍경을 보듯, 아니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그냥 하던 일을 마저 했다. 밀폐된 공간이 아니었는데도 거기서 나는 숨쉬기 힘들었고, 어디 부딪치거나 묶인 적이 없는데도 근육통을 느꼈다. 무언가 안에서 차올랐는데 목 언저리에서 막혀 나오질 않았다.

무언가 안에 쌓인 채 억눌려 있는 것. 그것을 억울이라고 한다. 나는 그날 억울을 체험했다. 그러나 거기서 내가 억울할 일은 없었다. 그러니 그 억울은 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것이었다. 언어장애가 있어 말할 수 없고, 지적장애가 있어 생각해낼 수 없는, 그러나 수십년의 시설생활 동안 쌓여왔던 것. 아마도 내 몸은 그들 몸에 쌓인 억울을 모방했던 모양이다. 답답했고 아팠고 나가고 싶었다. 몸 곳곳의 작은 성대들이 내보내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바로 이 느낌 때문에 이번 칼럼의 제목을 장애인들을 석방하라고 쓸까 했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지만 사실상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람들, ‘우리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너희는 거기 그렇게 갇혀 있으라는 선고를 받은 사람들. 그들을 석방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시설이 그렇게 끔찍한 곳이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시설을 함께 둘러보던 사람 중에는 시설이 생각보다 깨끗하고 생활교사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것 같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도 얼마 전에 여기 입소했다는 아이를 보는 순간, ‘어쩌다 이런 데 왔냐며 눈물을 왈칵 쏟는다. 그런데 실은 그 아이 곁에 앉아있는 중년 남자도 삼십년 전 누군가의 손을 잡고 여기에 온 아이였다.

시설 조사를 마치고 나오던 늦은 오후, 결국 한 사람이 나를 붙잡았다. 대화 중에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만약 나간다면 누구랑 살고 싶냐는 물음을 듣고는 나를 붙들었다. ‘나간다는 말 한마디가 그를 일깨운 것이다. ‘언제, 언제요? 언제 나가요? 언제 나갈 수 있어요?’ 계속해서 내 손을 붙잡고 물었다. 요양시설이니 본인이 원하면 언제든 나갈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와 눈을 오래 마주치지 못했다.

 

 

그사이 또 한 사람이 내 손을 잡았다. 휴대폰을 가진 극소수 중 한 사람인 그는 내게 휴대폰이 켜져 있는지를 봐달라고 했다. 한 달에 한 번 걸려오는 엄마 전화를 놓치면 안된다고.

그러고 보니 거기 사람들 대부분은 텔레비전이 있는 안쪽 거실이 아니라 출입문 쪽 거실에 모여 있었다. 누군가 문을 열면 일제히 고개를 든다. 그들 모두가 수십년간 그렇게 물어온 것이다. ‘언제, 언제요? 언제 나가요?’라고.

내가 이번 칼럼 제목을 약속이라고 잡은 것은 지난 금요일 아침의 일을 적어두기 위해서이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광화문 지하 역사의 농성장을 찾아왔다. 장애인 단체들이 장애인등급제, 부양의무제, 장애인수용시설의 철폐를 외치며 농성한 지 5년을 넘기던 시점이었다. 그는 농성장에 모셔둔 영정 속 장애인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며,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광화문 농성장의 염원을 담아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는 약속했다. 장애인등급제와 부양의무제를 단계를 밟아 완전히 폐지하겠으며, 장애인 정책을 수용시설 중심에서 탈시설로 바꾸겠다고. 정부를 대표해서 탈시설을 약속한 것을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 그는 분명히 말했다. 장애인들이 수용시설이 아니라 지역에서 함께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장관은 우리 앞에서 약속했지만 그것은 우리에 대한 약속일 수 없다. 그 자리에 있던 우리는 시설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이거나 이미 탈시설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장관은 우리 앞에 섰지만 우리 역시 누군가의 앞에 선 사람들일 뿐이다. 거기 서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들, 현관문이 열릴 때마다 일제히 고개를 들었던 사람들, ‘언제, 언제요? 언제 나가요?’라고 물었던 사람들. 지난 5년간 우리는 그들의 입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지난 금요일의 약속 또한 우리의 귀를 통해서 들었다. 우리 안에서 그들이 지켜보고 있음을 정부가 잊지 말기 바란다

 

 

 

 

 

 

 

 

출처:

http://biz.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1708271144001#csidxad08b9d87eb6532ae8fc3da0da62ba2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6 뉴스기사 김재순 장애인·청년·노동자의 죽음… 장애계 “사회적 타살” file 이음센터 2020.06.09 175
75 뉴스기사 정부, 3차 추경안에서 발달장애인 지원 예산 100억 원 삭감 file 이음센터 2020.06.08 196
74 뉴스기사 온라인 강의에서 소외당하는 장애인 대학생들 ‘학습권 보장’ 촉구 온라인 강의에서 소외당하는 장애인 대학생들 ‘학습권 보장’ 촉구 코로나19로 수면 위에 오른 장애인 학습권 문제 “똑같이 수업 듣고 싶다&rdq... 이음센터 2020.06.05 286
73 뉴스기사 ‘비장애인 시청권’ 핑계 대며 뉴스 수어통역 방송 거부하는 KBS file 이음센터 2020.06.04 165
72 뉴스기사 서울시·금천구, 5월 말경 행정처분… 시설 폐쇄 후 거주인 지원에 집중 file 이음센터 2020.06.04 163
71 뉴스기사 장애인고용법 시행령 개정안 즉각 철회하라 장애인고용법 시행령 개정안 즉각 철회하라 [성명]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5월 15일) 등록일 : 2020년 05월 15일 고용노동부는 지난 4월 24일 장애인고용촉진 ... 이음센터 2020.06.03 211
70 뉴스기사 올해 65세 활동지원 끊긴 최중증장애인, 서울시가 지원한다. file 이음센터 2020.06.01 192
69 뉴스기사 ‘사회적 거리두기’ 한국수어로 어떻게 표현할까? file 이음센터 2020.05.27 198
68 뉴스기사 자폐성 장애인과 가까워지는 7걸음 매년 4월 2일은 세계 자폐성장애 인식의날 (세계 자폐인의 날)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과 대화할 때, 여러분들은 어떤 방법을 쓰시나요? 서로 가까워지기 위해 공... 이음센터 2020.05.26 230
67 뉴스기사 휠체어 타고 레트로 감성여행 '서천 판교마을’ file 이음센터 2020.05.25 304
66 뉴스기사 뚜렛증후군, 처음으로 장애인등록 이뤄져 file 이음센터 2020.05.22 241
65 뉴스기사 [부고] 윤은주 동료지원가, 패혈증으로 17일 사망 file 이음센터 2020.05.20 228
64 뉴스기사 장애인들, 선거 때마다 반복된 참정권 침해에 중앙선관위 항의 방문 file 이음센터 2020.05.20 163
63 뉴스기사 ‘나를 보라’ 제18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28일 열린다 file 이음센터 2020.05.18 190
62 뉴스기사 서울시, 드디어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만든다 file 이음센터 2020.05.15 216
61 뉴스기사 코로나19 대책에서 배제된 빈곤층, 어떻게 개선될 수 있나 file 이음센터 2020.05.15 249
60 뉴스기사 신길역 장애인 리프트 추락사고, 2심에서도 유족 승소 file 이음센터 2020.05.14 211
59 뉴스기사 “장애인평생교육시설, 코로나19 방역 대책 마련해야” 1인 시위 돌입 file 이음센터 2020.05.14 231
» 뉴스기사 [고병권의 묵묵]약속 [고병권의 묵묵]약속 등록: 2017.08.27.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고려대 민연 연구교수 또 장애인 수용시설 이야기다. 지난 칼럼에 이어서 또 ... file 이음센터 2020.05.11 197
57 뉴스기사 [고병권의 묵묵]삶이 가장 축소된 순간, 혼자여선 안돼 file 이음센터 2020.05.11 247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5 6 7 8 9 10 11 Next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