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이야기
조현대 작가(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이용자)
1986년 서울맹학교에서 있었던 오래 전 이야기를 하나 해보려 한다. 서울 맹학교는 지방학생도 많고 서울에 집이 있어도 통학이 어려워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러다보니 부모님과 만날 기회가 자주 있지 않았다. 지방 학생들은 방학이 되어서야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고 많은 학생들은 외로워했다. 이화여대 특수학과의 서클 키비탄은 맹학교에 와 초등학생과 중학생에게 매주 목요일 저녁 시간에 책을 읽어주는 봉사 활동을 했다. 대학생들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등의 책을 낭독해주었고 낭독이 끝나면 삼삼오오 모여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5월과 7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있을 때면 맹학교 학생들은 참고서를 사서 대학생들에게 녹음을 해달라고 했다. 맹학교에는 자습서와 참고서가 전혀 없었고 기껏해야 교과서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시험 범위가 정해지면, 예상 문제 80여 문제 정도를 대학생들이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을 했고, 맹학교 학생들은 그걸 받아 시험공부를 하고는 했다. 나에게는 친하게 지내던 누나 한 명이 있었다. 어느날, 함께 학교 교문을 나와 300원짜리 떡볶이 2인분을 먹고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들고 학교로 돌아 왔다. 누나는 아카시아 나무 밑에 앉아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누나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뜸을 들여?”
나와는 격없이 지내던 터라 누나가 머뭇거리는 것이 의아했다.
"괜찮으니까 편하게 이야기해봐”
“야, 시각장애인 학생들은 너무 받는 게 익숙해져있더라. 우리 친구들은 어려운 시간을 내어 카세트 테이프에 8시간씩 목이 아픈 것도 참고 녹음을 해주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어. 너무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나는 누나의 말에 충격을 받았고 그 동안 내가 살아온 과거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시각장애인이다보니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도움을 나 역시 받아왔다. 많은 장애인 역시 나와 같이 여러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지금도 자원봉사자와 복지관, 자립센터를 통해 이것저것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장애인 입장에서 내가 한 마디 하고 싶은 것은 도움을 받을 때 도움을 준 상대방이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감사의 말을 꼭 해줬으면 한다. 대다수 장애인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워 물질로 감사 표시를 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말이나 또 큰 도움을 받았다면 편지, 그 밖의 방법으로 감사의 뜻을 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