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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삶이 가장 축소된 순간, 혼자여선 안돼

 

등록:202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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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며칠 전 미국의 한 연구자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코로나 시대 시민들의 상호부조와 연대에 대한 책을 함께 쓰고 싶다고 했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도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돕고 있는지,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에도 불구하고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를 모두에게 알리자는 것이다. 위험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생명을 살리기 위해 헌신하는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발코니에 나와 노래하고 연주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는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한 많은 이야기를,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가 사회심리학적 백신 개발의 시급성에 대해 말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다른 존재에 대해 형성하는 어떤 표상들은 코로나19 이상으로 전파력도 크고 치명적이다. 인간은 공포를 느낄 때 심리적 면역력이 크게 떨어진다. 이런 때 사람들은 평소라면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말들을 쏟아내고 터무니없는 폭력을 공공연히 자행한다. 지금이 바로 그렇다. 세계 곳곳에서 외국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나타나고 주류 미디어에서조차 이를 조장하는 말들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온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는 죽음의 수용소란 우리 영혼의 밑바닥에 전염병처럼 잠복해 있던 타인에 대한 표상이 떠오른 결과라고 했다. ‘이방인은 모두 적이라는 표상이 그것이다. 평소에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자신이 감염된지도 모를 수 있다. 그러다가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순간, 이를테면 공포를 느끼는 순간에 이 표상은 사람들의 머릿속을 뒤덮는다. 그러면 이방인이 적으로 보이는 환각 작용이 일어난다.

이런 일들은 대개 사회가 비상사태에 처할 때 나타나지만, 비상은 정상으로부터의 일탈이 아니라 정상에 대한 폭로일 때가 많다. 실제로 방역 모델은 근대적 주권 모델과 무척 닮았다. 두 모델에 전제된 타인에 대한 표상이 특히 그렇다. 안전을 위해 타인을 무증상 감염자로 간주하라는 방역 지침과 타인을 본성상 늑대로 간주하고 안전책을 도모하는 사회계약론은 멀리 있지 않다. 타인에 대한 이런 표상은 사람들을 혼자 떨어져 무력하게 만든다. 서로를 불신하기에 사람들은 국가를 믿는다. 근대 사회계약론은 이런 식으로 국가 출현을 정당화했다. 원자화된 인간이 절대주의 국가의 토대가 되어준 것이다.

 

 

공동 격리를 택한 활동가들과 방호복을 입고 중증장애인 옆에 나란히 선 활동가들의 모습은 함께 존재란 걸 일깨워준다

세상에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인간은 인간에게 신이다라는 말도 있다. 둘 중 어떤 표상이 더 현실에 부합하는지를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가진 표상에 따라 저마다의 현실을 갖게 된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외국인이 적군처럼 보이는 사람은 실제로 외국인에게 적군처럼 행동하고, 타인을 바이러스덩어리로 보는 사람은 그 자신이 타인에게 그렇게 다가가며, 마스크를 집어든 타인을 약탈자로 보는 사람은 그 자신이 약탈자처럼 마스크를 집어들 것이다. 불행히도 세계 곳곳에서 우리는 이런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나라는 나라에 갇혔고, 도시는 도시에 갇혔으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집에 갇혀 있다. 최고의 방역을 위해서라면 아예 모두를 11실에 가두어야만 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내게 메일을 보낸 연구자가 말하듯 우리에게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의 메일을 받고 떠오른 것은 중증장애인들과의 공동 격리를 자원한 장애인 활동가들의 이야기였다. 방역당국은 코로나19에 감염됐거나 감염이 의심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가격리를 명령했지만 중증장애인들은 자가격리된 채로는 살 수 없다. 정부가 아무 해결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을 때, 대구와 서울의 장애인 활동가들이 감염자들과 공동 격리를 자원했다.

 

이들은 요즘 흔히 하는 말로는 영웅들이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영웅담은 아니다. 나는 이들이 지켜낸 타인에 대한 표상과 우리 삶의 안전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싶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가장 먼저 희생당한 사람들은 시설에 수용된 중증장애인들이었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는 시설 수용을 중증장애인들의 안전을 위한 최고의 선택지처럼 말해왔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이것이 최악의 선택지였음을 보여주었다. 공동 격리를 택한 활동가들, 방호복을 입고 중증장애인 옆에 나란히 선 활동가들의 모습은 우리가 함께 사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삶이 가장 축소된 순간에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혼자여서는 안 된다는 것 말이다. 혼자는 삶의 단위가 아니다. 삶의 최소 단위는 함께이며, 작은 함께가 모여 큰 함께를 이루는 것이다. 나는 공동 격리를 자원한 장애인 활동가들한테서 그것을 보았다.

 

 

 

 

출처:

http://biz.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2004262052025&code=990100#csidx787b2450696e9599e03a7b395b38b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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