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장애인은 시험응시할 수 없다’는 한국애견협회
등록: 2021년 3월 23일
하민지 기자
장애계 “명백한 장애인 차별”, 인권위 진정
경기도 군포시에 사는 청각장애인 ㄱ 씨는 지난 2월, 국가공인 자격시험인 반려견 스타일리스트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실기시험장에 갔다. 실기시험은 필기시험에 합격한 사람만 응시할 수 있다. 필기시험은 지난해 11월에 응시했다. 그때도 감독관에게 장애인등록증을 보여줬지만 시험에 응시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ㄱ 씨는 실기시험장에서 쫓겨났다. 장애인이라는 이유에서다. 감독관은 ㄱ 씨가 내민 장애인등록증을 확인한 후 장애인은 실기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며 ㄱ 씨를 퇴실조치했다. 이후 반려견 스타일리스트 실기시험 공고문에는 ‘장애인복지법 시행령 제2조에서 규정한 장애인은 본 자격에 응시할 수 없음’이라는 규정이 생겼다. 원래는 명시되지 않았던 규정이다.
이에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아래 장애벽허물기) 등 장애인권단체는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장애인권단체는 23일 오후 2시, 서울시 중구 인권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애견협회의 행태는 장애인을 차별한 것”이라고 규탄했다.
ㄱ 씨가 응시했다가 퇴실조치됐던 1회 시험에는 장애인 응시제한 규정이 없었다. 2회 때 규정이 명시됐다. 사진 한국애견협회 시행공고문 갈무리
- “모든 장애인 응시 불가는 명백한 차별”
장애인복지법 시행령 2조에는 15가지의 장애 종류가 명시돼 있다. 자격증 시험을 주관하는 한국애견협회는 이 시행령에 규정돼 있는 장애인은 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즉, 장애의 종류와 정도에 상관없이 모든 ‘등록 장애인’은 반려견 스타일리스트 자격증을 취득할 수 없는 것이다.
ㄱ 씨는 중년 이후 청력이 떨어져 청각장애 판정을 받았다. 보청기를 사용하면 잔존 청력을 활용할 수 있다. 그래서 메이크업 관련 일에 종사할 때도, 두 아이를 키울 때도 문제는 없었다. 그러다 반려견 스타일리스트 자격증을 취득해 애견미용실을 열겠다는 꿈을 가졌다. 애견미용학원에 등록해 수강하며 자격증 공부를 하는 데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한국애견협회는 ㄱ 씨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실기시험 응시기회를 주지 않았다. ㄱ 씨가 시험 공고문에서 장애인 응시제한 규정을 찾을 수 없었다고 따지자 한국애견협회 측은 ‘홈페이지의 응시자격란에 명시돼 있다. 왜 공고문만 보고 홈페이지는 보지 않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청각장애인 애견미용사 안토니 씨가 수어로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유튜브 'Seek the World' 채널 갈무리
청각장애인은 반려견 스타일리스트가 될 수 없을까? 텍사스에서 ‘에이즐 펫 살롱’이라는 애견미용실을 운영 중인 안토니 씨는 수어를 사용하는 청각장애인이다. 그는 2019년 3월, 청각장애인인 자신이 어떻게 일하는지 설명하는 동영상을 제작해 유튜브에 올렸다.
영상에 따르면 안토니 씨는 문자언어로 고객과 소통한다. 반려견을 씻기고 털을 깎는 중에는 반려견 꼬리의 모양이나 흥분, 긴장 상태를 보고 컨디션을 확인한다. 동물을 사랑한다는 안토니 씨는 비장애인과 다름없이 자신만의 애견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다.
장애인권단체 활동가들은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하기 전 기자회견을 열었다. 현수막에는 '반려견 스타일리스트 자격시험 청각장애인 응시 제한 차별진정'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장애인권단체 활동가들은 안토니 씨의 사례를 들며, 장애 종류와 정도에 따라 장애인도 충분히 반려견 스타일리스트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철환 장애벽허물기 활동가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청각장애인, 상체를 사용할 수 있는 휠체어 이용 장애인 등은 반려견 미용이 가능하다. 한국애견협회는 장애인 모두의 시험 응시자격을 제한하는 조항을 삭제하고, 반려견 미용이 불가능한 장애인에 대해서만 다시 공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만호 원심회 회원도 한국애견협회를 규탄했다. 노 씨는 “향후 반려견 스타일리스트 시험에서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한 조건에서 시험을 볼 수 있도록 애견협회는 장애인 편의시설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애인권단체 활동가들은 기자회견이 끝난 후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한편, 한국애견협회에 장애의 종류와 정도를 고려하지 않고 모든 장애인의 응시를 제한한 이유를 물었지만 “회의 중”이라며 정확한 답은 하지 않았다.
활동가들이 인권위에 진정서를 내고 있다. 사진 하민지
출처: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