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멋진 엄마가 감옥에 갔다, ‘저항’이라고 했다
등록일: 2021년 3월 19일
글쓴이: 탁영희
알지도 못한 채 적었던 부모님 직업란의 ‘활동가’
집에 쌓이고 쌓인 출석요구서, 엄마의 세 번째 노역
나는 엄마가 자랑스러운데 왜 범죄자라고 하는 걸까
[편집자 주] 18일, 장애인 활동가 4명이 장애인운동에 가해진 정부의 벌금 탄압에 저항하며 노역 투쟁에 들어갔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이사장, 이형숙 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대표, 권달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 장애인운동에 가해진 벌금만 4440만 원. 장애인도 함께 지역사회에 살자고 외친 목소리에 대한 대가다. 정부의 벌금 탄압에 저항하는 장애인 활동가와 가족의 목소리를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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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노역투쟁 기자회견에서 이형숙 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대표가 ‘나는 벌금 대신 양심을 택했다’라는 피켓을 들고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하민지
나에게는 멋진 가족이 있다. 바로 엄마와 언니이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집이 아닌 밖에 있던 시간이 많았다. 유치원 때 나의 놀이터는 장애인복지관 복도와 복지관 앞 놀이터였다. 유치원이 끝나고 “엄마 보고 싶어”라고 하면 아빠는 나를 복지관에 데려다주었다. 여전히 엄마 껌딱지라서 지금 엄마와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이 나를 ‘애기’로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며칠 전에 중학생 때 엄마에게 쓴 편지를 발견했다. 엄마가 다이어리에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품고 다녔다. 내용은 이랬다.
TO. 엄마께
엄마 저 영희에요.
제가 매일 지각하고 학원에 늦게 데리러 오면 짜증 내서 죄송해요.
그리고 엄마도 좀 일찍 데리러 오고, 그만 좀 교육받으러 가고, 투쟁하러 가세요.
- 엄마 딸 영희 올림
비가 오는 날이면 부모님이 우산을 들고 데리러 오는 친구가 부러웠다. 비가 안 와도 학교 앞에 부모님이 차로 데리러 오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교육받으러, 투쟁하러 집을 비우는 엄마의 활동이 조금은 싫었다. 엄마는 현재 진보적 장애인운동을 하는 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대표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 직업란에 ‘활동가’라는 말이 뭔지도 모른 채 그냥 빈칸을 채웠다. ‘장애’라는 단어도 정말 늦게 알았다. 엄마의 걸음걸이는 장애가 아니라, ‘엄마의 걸음’이라고 알았고 다들 장애인을 거의 본 적이 없다고 말할 때,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삶을 살았다. 우리 집에서는 장애라는 걸 가르치지도,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런 엄마의 딸인 나의 언니는 엄마처럼 멋있다. 언니도 엄마처럼 장애인운동단체 활동가다. 엄마에게 “엄마가 가장 잘한 일은 언니를 낳은 일 같아”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엄마는 “언니가 그렇게 좋아?”라며 웃었다. 언니는 나에게 ‘처음을 항상 함께 하는 사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엄마가 노역장에 가면 나를 데리러 오고, 내가 힘들어하면 토닥여주던 사람이다.
이렇게 멋있는 사람들이 나의 가족이라고 말하기는 참 힘들고 무거웠다. 어디를 가도 나는 ‘~의 딸, ~의 동생’이었다. 나에게는 이들이 꼬리표처럼 느껴지던 순간들이 많았다. 내가 열심히 나를 설명해도 ‘~의 딸, ~의 동생’이라고 말하면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 말은 곧 내가 잘못하면 그들이 비난받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었다.
장애등급제 폐지 1주년인 2020년 7월 1일. 이날 장애계는 기만적인 장애등급제 폐지에 맞서 대대적인 투쟁을 벌였다. 엄마가 사다리를 목에 걸고 도로를 점거한 모습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핸드폰 카메라에 담고 있다. 사진 강혜민
작년, 나는 현재 재학 중인 대학교에서 ‘공정한 교수임용 투쟁’을 시작했다. 사실 이 투쟁은 작년에 처음 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학내 민주화를 위해 ‘연례행사’처럼 진행됐다. 작년엔 내가 속한 과가 주도적으로 했을 뿐이다.
그때 우리 가족과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아낌없는 물품 지원과 후원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 바쁜 사람들이, 집에서도 잘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장애인 이동권 보장이 하나도 안되는 오산까지 왔다. 우리 가족이 가진 것은 없지만 ‘투쟁과 연대’만큼은 남 부럽지 않게 갖고 있다. 그때도 엄마는 ‘420공동투쟁단’ 피켓을 가져와서 우리 학교 총장과 사진을 찍었다. 못 말려.
고등학교 2학년 때, 엄마가 처음 노역에 들어가면서 나는 “내년엔 나 고3이니깐 올해만이야!”라며 벼슬인 양 이야기를 했다. 그 말에 엄마는 “알겠어. 미안해.”라고 답하며 노역투쟁을 시작했다. 나는 담임선생님께 웹자보를 보여주며 “엄마 면회로 현장체험학습 쓰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안된다고도 못하고, 된다고도 못했다. ‘처음 보는 현장체험 학습 내용’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언니랑 연락하더니 ‘수원화성에서라도 사진을 찍어 오라’고 했다. 이렇게는 현장체험학습이 반려될 수 있다며 ‘위장’을 하자고 말이다.
그렇게 얻은 현장학습을 가기 전날, 언니랑 유튜브로 구치소 내부를 공부했다. 영상에서 알려준 내용대로라면 누워있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앉아있어야만 했다. 화장실은 어디 하나 잡을 곳도 없어 보였다. 엄마한테 물어보니깐 엄마는 아니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거짓말쟁이다.
그렇지만 1년 만에 엄마는 또다시 그곳에 들어갔다. 나는 “작년에 약속했잖아”라고 투정을 부리고 엄마는 웃으며 “그러게 미안해”라며 또 사과를 했다. 그때는 예상보다 길어진 노역 투쟁에 사람들 원망을 많이 했다. 혼자만 들어간 것이 아니라고 머리로는 알지만, 들어가기 전에 물도 음식도 거의 먹지 않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까탈스러운 엄마에게 “거기 밥 맛 없으니깐 지금이라도 많이 먹어” 했는데, 엄마는 “화장실이 불편해서 안 먹는 게 나아”라고 이야기하며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나는 그 말이 너무 싫었다.
그런 나의 엄마가 어제(18일) 세 번째 노역으로 구치소에 들어갔다. 그 이후, 4년 동안 들어가지 않길래 나는 안심했다. 집에 매일 같이 날아오는 출석 요구서를 보면서도 나는 왜 안심했을까. 너무 어리석은 안심이었다. 어쩌면 난 ‘이제는 들어가지 않겠지’라고 외면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 가족은 눈물이 많다. 다 엄마를 닮아서 그렇다. 지난 18일, 노역투쟁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며 또르륵 흐르는 엄마의 눈물을 보았다. 작년 여름,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촉구하며 했던 삭발식이 생각났다. 그때도 엄마는 삭발을 하며 ‘저항’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우린 언제까지 이렇게 저항하며 아파야 할까. 난 엄마의 활동이 자랑스러운데 왜 범죄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데 우리 가족의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엄마의 동료상담 별명이 ‘옹달샘’인데 이래서 지었나 보다.
나의 자랑스러운 엄마이자, 든든한 동지 ‘형쑤기’. 며칠 전, 화장실에서 넘어진 엄마의 부은 다리가 너무 걱정되고 신경이 쓰인다.
다들 힘들더라도 같이 저항해주세요. 우리 엄마를 포함한 네 명의 대표님들이 외롭지 않게 저항해주세요. 다들 빨리 우리 곁으로 돌아와요.
- 벌금 모금 계좌 : 국민은행 477402-01-195204 박경석(전장연벌금)
장애인 노역투쟁을 알리는 웹자보. 이형숙 대표가 경찰 군홧발 사이를 기어가고 있다.
* 필자 소개
탁영희. 대학에서 민중복지를 배우며 현재 4학년에 재학 중이고 노들장애인야학에서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출처 : 비마이너(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17)